둠 시리즈가 FPS 장르를 개척하며 PC 게임 시장의 판도를 뒤엎어버린 90년대 중반, 단 하나의 작품으로 FPS 의 거성으로 우뚝 솟아오른 게임이 있으니 바로 3D 렐름즈의 듀크 뉴켐 3D 입니다. 듀크 뉴켐하면 떠오르는건 역시 마초 캐릭터의 대명사인 주인공 듀크인데요. 곧게 세운 짧은 머리와 선글라스, 근육질 몸매에 찌그러진 표정으로 궁시렁대며 괴물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듀크의 모습은 지금과 같이 팀플레이에 초점이 맞춰진 FPS 가 아닌 싱글 플레이 람보 게임만 존재하던 당시의 FPS 게임에 착 들어맞는 캐릭터였습니다. 거리의 콜걸에게 달러 지폐를 비비적거리던 당시의 게임 표현에선 보기 드문 도발적 퇴폐성도 듀크 뉴켐의 캐릭터성 형성에 단단히 한몫 했었구요.
듀크 뉴켐 3D 의 대성공은 바로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졌고 개발사 3D 렐름즈는 97년 듀크 뉴켐 포에버라는 신작을 발표합니다. 베이퍼웨어계의 전설, 듀크 뉴켐 포에버의 험난한 여정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죠.
3D 렐름즈는 97년 듀크 뉴켐 포에버 (이하 DNF) 의 개발을 결정하며 새롭게 엔진을 짜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단 당시 유력 게임 엔진이었던 퀘이크 2 엔진을 게임 엔진으로 채택하는 방안을 선택했고, 만만찮은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합니다. 3D 렐름즈의 입장에선 무리한 지출이었으나 듀크 뉴켐 3D 의 성공 덕에 가능한 일이었죠. 하지만 3D 렐름즈는 개발 발표 후 6개월의 시간동안 퀘이크 2 엔진 개발툴을 수령하지 않은체 퀘이크 1 엔진을 이용한 의미없는 개발 시간을 보냈고 이 시기 게임 매체를 통해 공개된 스크린샷들은 모두 퀘이크 1 엔진 기반이었습니다.
이듬해 E3 쇼에서 퀘이크 2 엔진을 기반으로한 DNF 의 트레일러가 공개되며 화제를 모았으나 기대치에 비해 실망스런 모습으로 많은 우려의 목소리를 받았습니다. 당시 FPS 장르는 본격 3D 그래픽으로 넘어가며 퀘이크-언리얼 대립구도가 형성되던 시기였고 게임 엔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퀘이크 2 엔진의 출시에 이어 출시된 언리얼 엔진은 퀘이크 2 엔진에 비해 뛰어난 표현력을 자랑했으며 DNF 의 개방된 공간을 표현하기에도 더 적합하다는 판단으로 3D 렐름즈는 DNF 의 게임 엔진을 전격 교체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는 곧 프로젝트의 전면 초기화를 의미했으며 DNF 의 개발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언리얼 엔진 기반의 개발이 시작된 후 DNF 의 발매가 계속 연기되자 3D 렐름즈는 거센 비판에 직면합니다. 이에 3D 렐름즈는 '오늘날의 게임은 과거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이에 따라 개발에 신경써야 할 부분도 훨씬 많다. 최근 고만고만했던 FPS 게임들과 다양한 효과가 가미된 하프라이프 같은 게임들의 결과를 비교해보라. DNF는 이를 반영하고 있으며 과거 듀크 뉴켐 3D 와 같은 게임에 비해 5배에서 10배는 복잡한 구성을 할 것이다.' 라며 개발이 늦춰지고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과 함께 결코 게임을 대충 내놓지는 않을 것이란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언리얼 엔진 전격 교체 후 공개되었던 DNF 스크린샷
보다 좋은 게임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탓하기도 뭐합니다만, 3D 렐름즈의 사장 조지 브로서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던 것이 탈이었습니다. 조지는 이미 계획에 비해 발매가 너무 늦어졌던 2000년에 들어서도 DNF 의 개발 중 끊임없이 게임에 넣을 '새로운 요소' 를 찾아 헤맸고 적지 않은 팀원들의 반감을 샀다고 합니다. 결국 조지는 '게임의 최종 사양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는것 아니냐' 는 팀원들의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DNF 의 멀티플레이 환경 개선을 위해 언리얼 2 엔진으로의 업그레이드를 결정합니다.
잦은 프로젝트의 수정으로 인한 완성의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E3 2001 에서 공개된 새로운 DNF 트레일러는 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3D 렐름즈의 개발팀원들은 총 책임자 조지가 이에 만족하고 현상태로 게임 개발의 완료에 박차를 가하기를 원했지만, 조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완벽하고 놀라운 DNF' 의 개발을 위한 마음을 접지 않았고 DNF 의 개발은 2003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DNF 의 개발이 이같이 개발사의 의지하나로 길게 늘어질(?) 수 있었던 것은 개발사가 유통사의 투자를 받아 개발하는 형태가 아닌 개발사 3D 렐름즈 가 직접 개발 자금을 조달하는 형태를 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3D 렐름즈는 듀크 뉴켐 3D 의 대성공으로 많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직접 자금을 동원하고 유통사와는 단지 유통 계약만을 체결했기 때문에 유통사의 개발 진척에 대한 압력이 들어오면 '완성되면 내놓는다' 와 같은 답변을 하며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최초 DNF 의 유통권을 계약한 회사는 GT 인터렉티브였지만, GT 인터렉티브가 GOD 게임즈에 합병되었고 다시 GOD 게임즈가 테이크 투에 합병되면서 최종적으론 테이크 투가 DNF 의 유통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DNF
의 정처없는 개발 연기에 당시의 팀원들도 지쳤는지 2003년에 와선 18명의 인원만 개발팀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팀에서
나갔던 한 인원의 말을 인용하면 브로서드와 밀러는 95년의 사고방식으로 개발에 임했다고 합니다. 이시기 유통권을 가졌던 테이크
투는 3D 렐름즈에게 정처없는 발매 연기로 막대한 이익 창출 기회를 잃고 있다고 다그치지만, 3D 렐름즈의 브로서드는 '듣기
싫다' 는 자세를 일관하다 2003년 말에 가서야 '2004년 말 혹은 2005년 초 완성이 가능할 것 같다.' 는 희망적(?)
입장을 밝혔으나 이는 이뤄지지 않았죠.
말 그대로 철없는 장난이었던 DNF 의 만우절 장난
2004 년 만우절엔 아타리 2600으로 DNF 출시한다는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서늘했으며, 둠 3 엔진으로 또다시 엔진을 교체한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이는 '둠 3 같은 비주얼을 낼 수 있다' 는 인터뷰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둠 3 보다 먼저 나온다.' 는 3D 렐름즈의 과거 발언 경력 덕분에 팬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큰 화제를 낳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2004년 3D 렐름즈 뻘짓(?)의 결정타는 하프라이프 2 에 자극을 받아 기존 DNF 에 적용되던 카르마 물리 시스템을 스웨덴 머콘사의 차세대 물리 시스템으로 교체한 사례인데요. 이 검증되지 않았던 스웨덴의 물리 시스템 회사는 훗날 문을 닫았습니다. 결과론적 해석이긴 하지만 '새로운 것' 에 목메이던 3D 렐름즈의 폐해가 가장 잘 드러난 사례가 아닐까 싶군요.
개발팀원들은 제작 발표 후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완전히 지쳐갔고 회사의 사정도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2005년에서 2006년 사이 10명 남짓한 기존 팀원들이 회사를 떠났고 이런 3D 렐름즈의 내부 움직임을 주목한 매체들이 DNF 의 출시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으로 바라봤지만 3D 렐름즈는 새롭게 인원들을 보충하며 이런 비관론을 일축해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2007년 새로 합류한 한 팀원은 '생각보다 일이 훨씬 많이 진척되어 있었고 곧 발매가 가능할 것' 이라 생각했지만 총괄 책임자 브로서드는 '아직 2년은 더 개발해야 한다.' 는 입장을 밝혔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DNF 발매 연기의 주범은 하프 라이프 시리즈..
한편 DNF 의 유통권을 가지고 있던 데이크 투는 DNF 의 유통시 3D 렐름즈로 지불해야할 금액을 600만 달러에서 450만 달러로 낮추는 재계약을 체결했으며, 만약 3D 렐름즈가 2006년 연말까지 DNF 의 유통이 가능하게 완성시켜준다면 추가의 50만 달러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완고한 3D 렐름즈의 브로서드는 '50만 달러 따위에 휘둘리지 않겠다.' 는 굳은 의지를 선보이며 유유히(?) 2006년 한해를 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