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다. 코에이는 미친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지난 10여년의 세월동안 그들의 메인 프랜차이즈가 무쌍시리즈로 완전 바뀌어 딴살림 제대로 차린 상황을 백번 인정한다 해도 이럴 수는 없다. 90년대부터 삼국지, 신장의 야망과 함께 자사를 대표해온 메인 프랜차이즈였던 대항해시대의 넘버링 타이틀이 웹 게임이라니. 대항해시대 온라인은 넘버링이 아닌 '온라인' 이 붙어있지 않은가? 웹 게임이면 대항해시대 WEB 이라고 해야지 뜬금없이 넘버링이라니. 너무 이름이 투박한가? 그럼 작명소를 찾아가던가. 이는 십수년간 넘버링 패키지 게임을 기대해온 팬들의 기대를 애초에 져버린 배신의 수준을 넘어 철저한 모욕이다. ...이상이 올 초 대항해시대 5 일본 서비스 소식을 들었을 때 맴돌던 감정이었는데, 그 주인공이 최근 한국에 상륙했다. 굳이 안봐도 뻔한 비디오인데다 이미 일본 소식이 웹에서 몇가지 전파되었기에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지만, 무참하게 도륙된 추억의 대항해시대 차기작을 직접 보고 싶은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웹 게임에 대한 거부감, 그것은..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웹 게임은 惡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도내에서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웹 게임들은 공통적으로 행동력이라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며, 편의성, 접근성이라는 탈에 가려진 그 기반 시스템은 유저들에게 고통을 선사한다. 어쩌면 예외의 웹 게임이 충분히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고있던 행동력 웹 게임들이 유행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웹 게임에는 일절 관심을 끊고 살았으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항해시대 5 는 그 악랄한 웹 게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은, 행동력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대항해시대 5 모험의 시작, 나침반
웹 게임이 왜 악인가? 일반적인 F2P 게임들의 수익 모델인 유료 아이템은 가격의 적정함을 떠나 적어도 과금에 대한 보상을 유저에게 지급한다. 이는 게임에 따라 쾌적한 플레이를 위한 투자 시간을 줄이기 위한 선택 사항일 수도 있고, 그 자체가 필수 사항일 수도 있는데, (랜덤박스는 좀 예외이고, 요즘은 과금이 필수 사항으로 굳어지긴 했지만) 적어도 유저의 단순한 행동 자체에 제약을 가하진 않는다. 하지만 행동력 시스템은 유저의 단순 행동 자체에 과금을 하는 방식이다. 그것도 옵션 없는 종량제로. 한발짝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기본적인 행동 자체에 제약을 걸어 결제를 요구하며, 아이템 체계는 또 일반화된 유료 아이템 체계를 그대로 답습한다. 유저에게 돈 뜯어낼 구실을 최대한 치사하게 구석구석 하나부터 열까지 배치해놓는 것이 바로 행동력 웹 게임들의 특징인 것이다. 마치 식당에 밥먹으러 갔는데, 수저 사용하는데 돈내고, 젓가락 사용하는데 돈내고, 밥상 빌리는데 돈 낸 다음 음식은 재료 줄테니 알아서 해먹으라는 격이랄까. 물론 재료, 조리기구 사용료 역시 별도다. 그게 싫으면? 직접 재료 재배하고 젓가락 만들고 모든걸 자급자족해서 밥먹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그리도 비싼 식당이 제공하는 재료와 식기, 조리기구는 최상급인가? ... 한숨만 나올 뿐. 현재 시장에서 가장 저급한 게임 환경을 제공함에도 단순히 브라우저만 키면 된다는 편리함 하나를 무기로 유저들에게 가장 비싸고 번거로움을 요구하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일반적 웹 게임이고, 그 웹 게임의 틀을 대항해시대 넘버링 타이틀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제작사 코에이에게 실망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항해시대 5 는 싱글 플레이 웹 게임이라 다른 유저와의 직접 적인 경쟁이 게임의 주 시스템은 아니다. 결제 타 유저의 핍박에 서럽고 더러워 결제가 자연스레 이뤄지고 이것이 반복되는 판은 아니라는 것. 뭐 답답한건 매 한가지지만.
역대 시리즈 짬뽕에 결제 요소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본 시스템들
5편은 이제까지의 시리즈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할 만큼 다양한 요소들을 차용하여 짬뽕시켰다. 추억팔이 요소부터 언급하자면 캐릭터성이 강조되었던 2편과 4편의 주인공들 중 일부는 동료 항해사로 등장하고, 일부는 NPC 함대로 등장한다. 여기에 역사 속 주요 실존 인물들까지 추가되어 동료로 삼을 수 있는 인물들이 있고 단순히 스토리에만 등장하는 인물들도 있다. 물론 메인 일러스트에 등장하는 오리지널 캐릭터들도 등장한다. 특이한 것은 3편의 주인공 중 하나인 라몬은 5편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게되는 계기가되는 실종된 아버지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의 동료가 되는 로코 알렘켈과 전혀 모르는 관계로 설정된 것을 봐선 이름만 차용되었을 뿐 3편의 세계관이 연계되는 것은 아닌듯 하다.
캐릭터 카드는 대항해시대 5 의 대표적 시스템으로 주인공을 제외한 동료 항해사들은 모두 카드 캐릭터로 구성되어 SR, R, N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고, 이들은 게임 진행을 통한 경험치 축적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 카드를 제물삼아 경험치를 흡수하며 경험치를 축적하여 레벨이 상승한다. 각 캐릭터의 최대 레벨이 되면 각성 시스템을 통해 등급 조정이 이뤄지기도 하지만 SR 과 R 의 차이가 매워지는 것도 아니고, 설령 매워진다 하더라도 그 과정의 고달픔은 두말하면 잔소리. 주인공의 레벨 가치는 오직 행동력 증가와 함대 슬롯 증가 뿐이고, 게임상 행동 성능에 반영되는 능력치는 각 선박의 항해장, 회계장, 갑판장 항해사들의 능력치 합이므로, 원활한 게임을 위해선 이들의 레벨을 꾸준히 높혀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퀘스트나 전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NP 라는 특수 화폐를 모아 N 등급 항해사들을 주구장창 뽑아 제물로 삼거나, 그들이 원하는 유료 결제로 R 등급들을 뽑으면 된다. 당연히 SR 이 보장되는 뽑기는 있을 수 없고, 어떤 항해사가 나올지도 모른다. 즉 랜덤박스다. 4편은 5편의 전반적 게임 시스템의 근간이 되고 있다. 고정된 화면에서 주요 시설을 클릭하여 항구를 돌아다니는 것이나 이벤트 진행의 전개 방식은 물론이고, 해역별로 구분된 지도와 지도에서 항구를 클릭하여 이동하는 방식, 교역 화면 구성과 방법은 모두 4편을 베이스로 한다. 단, 교역의 변화점이라면 선박의 창고 갯수 단위 거래가 아닌 2편이나 3편과 같은 교역소의 상자 단위로 거래가 되며, 선박의 적재량은 용도에 따라 늘어날 수 있지만 한척당 한가지의 품목만 실을 수 있다. 이는 웹게임이라는 환경 특성상 복잡한 교역 시스템을 구현하기보다는 화면 변화 없는 클릭을 지향하다보니 좀 어설퍼보이는 형태가 된 듯 하다. 편의성 문제로 클릭을 통한 물품 선택 및 선박 지정만 지원되고 드래그 드롭이 지원되지 않는 난해함이 있다.
캐릭터와 함께 대항해 시리즈의 중요 요소인 선박은 설계도를 입수하여 특수화폐인 자재를 소모하여 건조한다. 또한 선박당 3개씩 제공되는 장비 슬롯에는 장갑이나 대포, 선수상 등을 장착하여 선박의 성능을 높일 수 있다. 이전작들과 달리 항구의 발전도는 선박 건조나 장비 구입에 영향이 없으며 모든 것은 또다시 등장하는 랜덤 박스의 결과물이나 일부 퀘스트 보상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결제 화폐로 고급 선박이 나올 확률이 높은 뽑기를 하느냐 자재를 소모하여 천운에 맞기는 뽑기를 할 것이냐로 유저의 선택은 갈린다. 설계도는 한번 사용하면 그것으로 끝인지라 함대의 모든 선박을 괜찮은 성능의 선박으로 구성하려면..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황당함과 참신함이 어우러진 대항해시대 5
특이하게도 5편은 해상 이동 필드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지도가 곧 맵이다. (좀 말이 이상하지만?) 해역 지도에서 이동할 구간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행동력이 소모되며 주인공은 해당 위치로 이동한다. 항구나 거점을 클릭하면 이동 후 입항 혹은 상륙 후 탐험을 시작하며 지도에 표시된 함대를 클릭하면 해당 함대에게 접근하여 전투를 시작한다. 이렇게 지도에서 목표를 지정 후 출항하면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그래픽 품질을 낮춘 모습의 폴리곤 배가 출항하는 모습과 입항하는 모습, 이동 중 간간히 해상 이벤트가 등장하는 연출이 유저의 조작과 무관하게 등장하며, 해상 이벤트는 간단한 퀴즈 게임같은 형태로 화재나 좌초 등의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질문하고 선택에 따른 결과가 함대의 상태에 반영된다. 이런 해상 요소의 간소화는 대항해시대 온라인이 망망대해에서의 다소 난감함을 선사했던 것에 반해 너무 간소화해버린지라 스스로의 조작으로 해상을 탐험하는 재미를 중시하는 유저에겐 큰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부분이다.
이 황당한 간소화는 전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선박의 조작 없이 중단거리 포격, 장거리 포격, 갑판전 3가지의 공격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 NPC 가 선택한 공격 방식과의 상성을 따지는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구성했다. 선박 그래픽이나 사운드나 모두 대항온의 재료들을 그대로 가져다 썼기에 대항온 전투를 구경하는 기분이랄까? 편한건 좋은데 선박이나 캐릭터 능력치의 영향을 워낙 많이 받는지라 가위바위보 특유의 눈치 전략 요소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동부터 전투까지 반자동으로 구현된 이런 형상은 좋게 봐주면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반응이 다를 것으로 보이는데, 웹 게임이라는 환경의 한계와 대상 유저층에 대한 고려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해도 좀 실망스러운 모습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너무 성의없어 보이잖아. 이게 최선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 모습의 네덜란드 주변이
지도만 갈아끼면 실제 이런 지형으로 바뀌고 내륙으로 해로가 열린다
한가지 참신했던 대항해시대 5 의 유일한 절대 장점 요소라면 세계 지도의 다변화 시스템이다. 주인공이 가진 나침반과 청금석의 결합으로 일어나는 의문의 반응으로 일행이 가진 지도의 형태에 따라 세계의 지형이 실제로 바뀐다는 세계관 덕분에 같은 이베리아 반도라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있는 실 지형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사이에 운하가 존재하는 가상의 이베리아 반도를 교차하며 게임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시스템 덕분에 3편에서만 구현되었던 내륙 도시의 존재가 보다 확실히 부각되고 있고, 시리즈가 오래되면서 다소 뻔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항구의 구성에 신선함을 더해주고 있다. 적어도 이 시스템만큼은 새로운 대항해시대라는 느낌을 선사해준다.
제한 사항을 너무 얄밉게 활용해 고통을 주는 싱글플레이 웹 게임
대항해시대 5 가 웹 게임이라 싫은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교역소에서 판매하는 교역품은 재고를 모두 구입하고나면 해당 물품을 재구매하려면 다른 항구들을 꽤 여러곳 돌아다녀야 재고가 복구된다. 이는 효율적인 교역 루트에 제한을 두는 장치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비효율적인 다른 항구들을 의무적으로 돌아다니게 유도하려는 의도가 더 크다. 유럽을 기준으로 보면 중부 유럽에서 한번 재고를 바닥내면 복구를 위해서 대략 10번의 항구 이동이 있어야 하는데, 항구에 한번 들릴때마다 해당 항구의 재고는 모두 바닥이니 현실적으로 중부-북부 유럽 순회공연을 한번 돌아야 복구되는 수준이다. 백번 양보해서 너무 쉬운 게임의 방지라고 쳐도 이 제한은 너무 가혹하며, 교역 루트 발견의 재미마저 앗아간다.
여기에 발굴 시스템이 더해지면 이야기는 더 심각해진다. 상륙지마다 발굴을 통해 유적등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발굴을 위해서는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고, 조사 완료 후 발굴에는 행동력과는 별개의 발굴 포인트라는 개념이 별도로 부여된다. 이 발굴 포인트는 레벨업 시 충전되거나 항해 중 자연스럽게 서서히 충전되는데, 최대량이 워낙 적은지라 발굴 찔끔 하고 포인트를 체우고 발굴 찔끔하고 포인트를 체워야 하며 이는 결국 행동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검은 의도임이 뻔하다. 그 뿐인가? 적대항구 잠입 시 뇌물을 주는 선택지에서마저 게임 화폐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행동력을 함께 제하는 등, 그 빌어먹을 행동력을 최대한 비효율적으로 소비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는 것이 너무 눈에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건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대항해시대 5 는 싱글플레이 게임이라는 점이다. 웹 게임의 가장 주를 이루는 전략 전쟁 게임에선 타인의 현질이 자신의 현질을 부르고, 자신의 현질이 또다시 타인의 현질을 부르는 돌고도는 돈지랄의 향연속에 게임 밸런스가 급격히 무너지는 시나리오로 치닫는 것에 반해 대항해시대 5 는 자신이 자재력만 있다면 느긋하고 소소하게나마 시리즈 팬으로써의 추억에 잠길 수는 있을 것이다. 본격 플레이를 못하는게 결정적 문제로 결국 그만두게 되겠지만. (출근 전 10분, 점심 시간 10분, 퇴근 전 10분, 잠자기 전 10분 ... 하려면 이런식으로 할 순 있을 듯) 실상은 추악하고 비슷한 것들로 이리저리 떼워진 체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만 극대화된 추억팔이 게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웹 게임으로 오면서 간소화된 부분들에 대한 보완이 제대로 이뤄진 패키지 게임으로 발매가 된다면 시리즈 팬으로써 매우 즐겁게 즐겼을 말 그대로 십수년을 기다린 게임인지라 너무 아쉽다.